귀찮음이라는 숨은 매출, 에이전트가 걷어낼 때 먼저 물을 것

귀찮음은 더 이상 돈이 되지 않는다 대표 이미지

정가 1만 원, 할인 전 마진 3천 원짜리 상품에 2천 원 쿠폰을 뿌린다고 해보죠. 쿠폰 사용률이 10%면 평균 마진은 2,800원, 40%면 2,200원으로 약 21% 줄어듭니다. 카카오벤처스가 든 계산인데, 저는 여기서 한 칸 더 가보고 싶습니다. 소비자의 AI 에이전트가 결제할 때마다 쿠폰을 빠짐없이 찾아 쓰면 사용률은 100%에 가까워지고, 평균 마진은 1,000원까지 내려갑니다. 처음 마진의 3분의 1이에요.

이 숫자가 말하는 건 쿠폰이 원래 '모두에게 주는 할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쿠폰을 찾고 등록하는 수고를 감수하는 사람에게만 낮은 가격이 돌아가고, 몇천 원 아끼려고 시간을 쓰기 싫은 사람은 정가를 냈죠. 귀찮음이 가격을 나눠주고 있었던 겁니다. 카카오벤처스는 이 글에서 귀찮음이 맡아온 역할을 셋으로 나눴습니다.

귀찮음이 맡아온 세 가지 역할 표

귀찮음은 비용이 아니라 매출이었다

첫째는 선별입니다. 행동한 사람만 할인을 받으니 가격 민감한 고객이 저절로 골라집니다. 둘째는 고착이에요. 보험, 통신, 금융처럼 갈아타는 과정이 복잡한 시장에서는 더 나은 상품이 있어도 기존 계약이 유지되고, 그 높은 리텐션에는 상품이 좋아서 남은 고객과 바꾸기 귀찮아서 남은 고객이 섞여 있습니다. 셋째는 배급입니다. 보험금이나 환급금은 금액이 작거나 절차가 복잡하면 포기하는 사람이 생기고, 그만큼 실제 지급이 줄어요.

세 가지를 한 줄로 묶으면, 귀찮음은 많은 사업에서 비용이 아니라 매출이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소비자가 행동하지 않아서 생기던 돈이죠. 저는 이 글의 가장 날카로운 문장이 "높은 리텐션에는 상품이 좋아서 남은 고객과 바꾸기 귀찮아서 남은 고객이 함께 섞여 있다"는 대목이라고 봐요. 대시보드의 리텐션 그래프는 두 집단을 구분하지 않으니까요. 에이전트가 계약 기간 내내 시장을 다시 훑기 시작하면, 그래프가 처음으로 둘을 갈라 보여줄 겁니다.

에이전트가 무서운 건 한 번 더 부지런한 소비자여서가 아니라 지치지 않는 소비자여서입니다. 사람은 큰맘 먹고 한 번 비교하고 나면 몇 년은 잊지만, 조건을 한 번 정해둔 에이전트는 매달, 매주 다시 비교해요. 경쟁이 가입과 갱신 시점에만 벌어지던 시장이 계약 기간 전체로 넓어지는 셈이죠. 가입할 때 큰 혜택을 주고 장기간 이용으로 회수하는 사업이 가장 먼저 흔들리는 이유입니다. 고객 한 명을 데려오는 데 쓸 수 있는 돈의 상한이 예상 유지기간에서 나오는데, 그 유지기간이 짧아지면 획득 예산부터 다시 짜야 하거든요.

배급 쪽은 더 무겁습니다. 처리 업무는 AI로 자동화할 수 있어도 정당한 청구에 나가는 돈은 못 줄이거든요. 낮은 청구율을 전제로 가격을 매긴 상품이라면 권리 행사율이 오르는 것 자체가 손익 문제가 됩니다. 글 서두에 나온 영국 고용심판소 사례가 여기서 다시 읽힙니다. 2026년 4~6월에 단일 청구 1만4천 건이 들어왔는데 처리된 건 6,100건이었고, 6월 말 미처리 사건은 7만 건까지 쌓였어요. 신청의 병목을 AI가 없애자 처리 능력이 새 병목이 된 겁니다. 기업도 똑같은 일을 겪을 수 있습니다. 지급액보다 먼저 청구 처리 큐가 무너질 수 있다는 거죠.

에이전트는 누구 편인가

여기까지는 동의합니다. 다만 이 글에는 큰 전제가 하나 깔려 있어요. 에이전트가 소비자를 위해 움직인다는 전제입니다. 그래야 "행동은 비슷해지고 선호는 선명해진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부지런한 사람만 최적의 선택을 하던 차이가 사라지고,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의 차이만 남는다는 거죠.

저는 이 전제가 가장 의심스럽습니다. 에이전트를 누가 운영하고 누가 돈을 내느냐에 따라 '최적'의 정의가 바뀌기 때문이에요. 소비자가 구독료를 내는 에이전트라면 쿠폰을 끝까지 찾아줄 이유가 있습니다. 판매자에게서 거래 수수료를 받는 에이전트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고요. 그런 에이전트에게 '가장 싼 보험'과 '수수료를 주는 보험'이 다를 때 어느 쪽을 고를지는 기술이 아니라 사업 모델이 정합니다. 선호가 선명해지는 게 아니라, 에이전트 운영사의 선호가 소비자의 선호로 둔갑할 수도 있어요.

이 질문은 기업 쪽 계산도 바꿉니다. 카카오벤처스는 행동률이 높아지는 걸 전제로 재설계를 권하지만, 현실의 기업에게는 다른 선택지도 있어요. 에이전트의 접근 자체를 막거나, 사람 인증을 다시 끼워 넣어 마찰을 되살리는 길입니다. 귀찮음이 매출이었다면 그 매출을 지키려는 쪽이 나오는 건 자연스럽습니다. 이 글을 쓴 곳이 AI 서비스에 투자하는 VC라는 점을 생각하면, 에이전트 확산을 기정사실로 두고 그 위에서 대응을 고민하는 구도가 이해는 됩니다. 다만 실제 시장은 재설계하는 회사와 다시 막는 회사로 갈라질 가능성이 커 보여요.

재설계가 맞는 회사, 막는 게 맞는 회사

사업의 재설계 표

글이 제시한 재설계 방향은 구체적입니다. 통신사가 실제 사용량에 맞는 더 싼 요금제를 먼저 제안하면 고객당 매출은 줄지만 경쟁사로 옮길 가능성도 줄어듭니다. 고객이 바꾸지 않아 얻던 수익을 스스로 포기하는 대신, 이탈 감소로 늘어나는 고객가치가 더 큰지를 따지라는 거죠. 쿠폰은 넓게 뿌리지 말고 신규 구매나 추가 구매처럼 원하는 행동에 묶고, 보험은 청구율을 다시 낮추기보다 높은 권리 행사율에서도 수익이 남도록 가격과 보장 범위를 짜라고 합니다. 지표도 할인 사용률 대신 증분 구매를 보라고 하고요.

저는 이 처방이 맞는 회사의 조건이 꽤 좁다고 봅니다. 고객이 남는 이유가 상품에 있는 회사여야 해요. 귀찮아서 남은 고객의 비중이 큰 회사가 먼저 더 싼 요금제를 제안하면, 이탈은 막을지 몰라도 매출은 그 귀찮음의 크기만큼 빠집니다. 그 회사에게는 재설계가 아니라 상품 자체의 경쟁력을 올리는 일이 먼저고, 그동안 버티려고 에이전트를 막는 쪽을 택할 유혹이 클 겁니다.

반대로 상품이 좋은 회사에게 이 변화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관찰한 고객 행동에는 실제 선호와 행동비용이 섞여 있어서, 같은 보험을 5년 유지한 고객이 상품을 좋아해서 남았는지 귀찮아서 남았는지 알 수 없었어요. 행동비용이 사라지면 남는 고객은 진짜로 고른 고객입니다. 리텐션 숫자는 내려가도 그 숫자를 믿을 수 있게 되는 거죠. 저는 이 대목이 투자자 시선의 이 글이 짚지 않은, 운영자에게 더 쓸모 있는 이득이라고 봐요.

어디부터 손댈지도 글이 꽤 실용적으로 정리했습니다. 할인 사용률에 따라 마진이 크게 흔들리는 회사는 프로모션 구조부터, 비교 빈도가 늘어 유지기간이 짧아질 회사는 획득·유지 구조부터, 청구율이 수익성을 크게 떨어뜨리는 회사는 가격과 보장 조건부터 보라는 겁니다. 손익에 가장 민감하게 닿는 변수 하나만 골라 먼저 시뮬레이션해보는 것, 그게 이 글에서 월요일에 바로 가져갈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읽은 경영진이 먼저 할 일은 손익을 다시 계산하는 게 아니라, 자기 회사 리텐션 중 '귀찮아서 남은 몫'이 얼마인지 추정해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몫이 작다면 카카오벤처스의 처방대로 상시 재계산하는 운영을 서둘러도 됩니다. 그 몫이 크다면, 에이전트를 막을지 말지 고민하기 전에 그 고객들이 왜 아직 남아 있는지부터 정직하게 들여다봐야 합니다. 귀찮음이 사라지는 속도보다 그 답을 찾는 속도가 느린 회사가 가장 크게 다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