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를 못 바꾼 리브랜딩이 로고를 안 바꾼 리브랜딩이 되기까지

KT 비주얼 아이덴티티 프로젝트

"처음에는 제약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플러스엑스 BX팀의 노현준 디자이너가 KT 비주얼 아이덴티티(Visual Identity, VI) 프로젝트에서 기존 로고를 그대로 둬야 했던 조건을 두고 한 말입니다. 같은 사람이 인터뷰 끝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기업과 소비자 모두 로고 하나가 브랜드 전체를 대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래서 기업들도 로고를 바꾸기보다 디자인과 광고와 서비스 경험 전반에서 아이덴티티를 다시 세우는 쪽을 택하고 있다고요. 한 인터뷰 안에서 제약이 시대의 흐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이 인터뷰를 그 변화의 기록으로 읽었습니다. 김아영, 유희정, 노현준 세 디자이너가 질문에 답하며 의도한 메시지보다, 답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선택과 엇갈림이 더 많은 걸 말해 준다고 봅니다. 질문 순서는 버리고 네 갈래로 다시 묶어 봤습니다.

제약이 철학이 되는 과정

로고를 유지한 이유에 대한 첫 답은 솔직했습니다. 김아영 디자이너는 KT가 AICT(AI+ICT) 기업으로 전환하겠다는 방향을 세우면서 그에 맞는 이미지가 필요해졌지만, "그룹 산하 모든 계열사에서 사용하고 있는 CI를 변경하는 것은 어렵고 큰 일이었죠"라고 답합니다. 바꾸지 않은 게 아니라 바꾸기 어려웠던 겁니다. 그 뒤로 답은 조금씩 의미를 얻습니다. 유희정 디자이너는 로고를 바꾸지 않았기에 새 비주얼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갔다고 하고, 노현준 디자이너는 KT가 쌓아 온 자산과 인지도에 비해 그동안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이 KT를 충분히 대변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오히려 로고 유지가 키포인트처럼 느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에서는 업계 전반의 흐름이 됩니다.

저는 이 과정을 비꼬려는 게 아닙니다. 제약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 건 좋은 디자이너가 늘 하는 일이고, 실제로 이 프로젝트는 그 제약에서 가장 좋은 아이디어를 끌어냈습니다. 다만 다른 팀이 이 사례에서 가져갈 교훈으로는 마지막 답보다 첫 답이 더 쓸모 있다고 봅니다. 계열사가 많은 대기업에서 로고는 디자인 자산이기 전에 인프라입니다. 간판과 매장과 유니폼과 계열사 서비스 화면에 깔려 있어, 바꾸는 순간 비용이 그룹 전체로 번집니다. 그래서 대기업 리브랜딩에서 로고를 지키는 선택은 트렌드라기보다 비용 구조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고, 그걸 솔직하게 인정해야 그다음 질문, 그럼 로고 바깥의 무엇을 바꿀 것인가로 제대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 질문의 답은 노현준 디자이너가 무심코 이미 내놓았습니다. KT가 쌓아 온 자산과 인지도에 비해 그동안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이 KT를 충분히 대변하지 못했다는 말이요. 외부 에이전시가 고객사의 지난 작업을 두고 하기엔 꽤 솔직한 진단이고, 저는 이 문장이 프로젝트의 진짜 문제 정의라고 봅니다. 문제는 로고가 아니라 로고 주변이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로고를 지킨 건 제약 때문만이 아니라 진단에도 맞는 선택이었고, 첫 답과 마지막 답 사이의 간격은 생각보다 좁아집니다.

기존 kt 로고에서 FLOW·TRANSITION·CURVE를 읽어 낸 분석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이 프로젝트의 핵심인 '인텔리전트 플로우(Intelligent Flow)'입니다. KT CI의 플래그 모티프(Flag Motif)는 통신회사로서 신호와 방향을 전하던 깃발에서 왔습니다. 팀은 바람에 따라 끊임없이 모양이 달라지는 깃발을 AI라는 새 시대의 흐름과 기술 변화에 유연하게 반응하는 기업의 모습으로 넓히고, 과거의 깃발이 신호를 전했다면 21세기의 깃발은 데이터의 흐름을 상징한다고 해석했습니다. 형태는 로고 안에서 찾았습니다. CI가 곡선으로 살짝 꺾였다가 직선으로 나아가고 다시 곡선으로 꺾이는 모양에서, 직선과 곡선이 공존하며 앞으로 뻗어 나가는 형상을 KT다운 흐름으로 정의했죠. 로고를 못 바꾸는 상황에서 로고를 해부해 새 언어의 문법으로 삼은 셈이고, 저는 이게 이 인터뷰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대목이라고 봅니다.

'선도'와 '스며듦', 한 시스템에 실린 두 목소리

인터뷰를 따라 읽다 보면 이 VI가 서로 다른 두 방향을 동시에 품고 있다는 게 보입니다. 한쪽은 선도입니다. 유희정 디자이너는 KT 레드를 쓰되 시대를 선도하는 AI 혁신 기업의 위상을 드러내려고 재질 표현을 더했고, 3D 모델링으로 만든 플로우의 빛이 굴절되는 부분에 유리처럼 색이 진하게 맺혔다가 풀리며 흩어지는 인상을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2D, 3D, 영상을 오간 실험도 선도적인 기업 이미지를 원한 KT 디자인팀의 요청에서 시작됐고, 그 결과물은 광화문빌딩의 초대형 미디어월 KT 스퀘어에 걸렸습니다. 인터뷰어가 이 비주얼은 영상이라는 매체에 더 맞겠다고 짚은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다른 한쪽은 스며듦입니다. 김아영 디자이너는 앰비언트 텍스처(Ambient Texture)를 설명하며 "최첨단을 달리는 기술 기업보다는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사람들의 삶을 조금씩 변화시키는 기술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담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빛을 머금되 강하게 반사하지 않고 은은하게 퍼뜨리는 반투명 무광 질감이 그 결론이었고요.

깃발에서 플로우 그래픽과 앰비언트 텍스처로 이어지는 전개

최첨단을 내세우는 대신 스며들겠다는 말과, 시대를 선도하는 위상을 드러내겠다는 말은 같은 인터뷰 안에서 다른 사람의 입으로 나옵니다. 저는 이걸 모순보다 분업으로 읽습니다. 미디어월과 영상처럼 크게 보여 줘야 하는 접점에서는 굴절하는 플로우가 선도를 말하고, 사원증과 문구류와 매장처럼 매일 손에 닿는 접점에서는 무광 반투명 질감이 스며듦을 말하는 식으로요. 다만 인터뷰는 이 둘을 하나의 개념처럼 이야기하고, 어느 접점에 어느 목소리를 쓸지는 따로 말하지 않습니다. 계열사가 많은 그룹이라면 이 배분이 가이드의 첫 장에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계열사는 모든 걸 빛나게, 어떤 계열사는 모든 걸 흐릿하게 만들 테니까요.

렌더에서 먼저 태어난 질감은 사원증 위에서 살아남을까

유희정 디자이너의 답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고백은 작업 순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과거에는 2D 환경에서의 구현 가능성이 표현의 기준이자 제약이었는데, 지금은 브랜드다운 표현을 발견하는 과정에 먼저 집중하고 실물 구현 방법은 그 뒤에 찾는 쪽으로 프로젝트 방향이 바뀌고 있다고요. 이번에도 3D 디지털 환경에서 형태와 재질감을 먼저 세우고, 실물 구현 방식은 개별 접점을 디자인하며 찾아 나갔습니다. 실물 구현 가능성을 최우선으로 뒀다면 지금 같은 인상은 나오기 어려웠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이 순서가 표현의 폭을 넓힌 건 분명합니다. 대신 위험은 뒤로 밀립니다. KT는 매장, 굿즈, 사내 물품처럼 오프라인 접점이 많은 기업이라고 김아영 디자이너 스스로 말했고, 메인 컬러인 레드 하나도 온오프라인에서 일관되게 나오도록 여러 차례 인쇄와 발색 테스트를 거쳐야 했습니다. 색 하나가 그만큼 손이 가는데, 유리와 반투명 소재 사이 어딘가에 있다는 질감은 어떨까요. KT 디자인팀은 이 질감을 두고 유리처럼 빛이 맺혔다가 끝으로 가며 부드럽게 흩어지는 게 신소재 같다고 했고, 노현준 디자이너는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다며 애플의 리퀴드 글라스를 예로 들었습니다. 만든 사람도 한 문장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질감을, 앞으로는 계열사의 디자이너와 인쇄소와 굿즈 제작사가 재현해야 합니다.

앰비언트 텍스처를 반투명 소재로 옮긴 문구류 목업

팀도 이 문제를 알고 있었다고 봅니다. 앰비언트 텍스처를 시스템으로 만드는 게 어렵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유희정 디자이너는 '앰비언트 텍스처다운' 소재와 접점별 사용 예시를 만들었다고 답합니다. 사원증 카드를 만든다면 어떤 소재와 어떤 프린팅 방식을 써야 그 인상이 나는지까지 가이드에 넣었고, 개별 항목을 디자인해 넘기는 대신 큰 개념과 다양한 적용 예시를 함께 넘겨 개념 자체를 이해하게 했다는 거죠. 저는 이게 맞는 처방이라고 봅니다. 다만 목업 속 반투명 파일과 가방은 좋은 소재로 만든 최선의 경우입니다. 이 시스템의 진짜 시험은 플러스엑스가 떠난 뒤, 예산이 빠듯한 계열사 행사의 종이 전단이나 매장 한구석의 안내물에서 치러질 겁니다.

그런 자리를 위해 저라면 가이드에 순서를 하나 더 적겠습니다. 질감을 재현할 수 없는 접점에서는 형태가 브랜드를 대신 지게 하는 겁니다. 유희정 디자이너가 정적 매체에서 흐름을 어떻게 보여 줄지 고민한 끝에 찾은 답, 곡선으로 꺾였다가 직선으로 나아가는 형태 규칙은 유리 굴절 없이 단색 인쇄로도 살아남습니다. 굴절과 반투명은 좋은 소재와 넉넉한 예산이 있을 때의 최상위 표현으로 두고, 그 아래 단계마다 무엇을 덜어 내도 되는지를 정해 두면, 질감이 빠진 전단도 여전히 KT의 흐름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가장 앞선 산출물은 AI 프롬프트 가이드였다

인터뷰의 마지막 축은 분량으로는 작지만, 저는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앞서 있는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플러스엑스는 KT 내부 디자인팀이 새 아이콘을 계속 만들 수 있도록 AI 프롬프트 가이드라인을 만들었습니다. 김아영 디자이너에 따르면 앞서 했던 채널 A 프로젝트에서는 여러 AI 도구를 조합해 결과물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집중했지만, 이번에는 사내 구성원이 쉽게 쓸 수 있도록 범용성 높은 단일 도구 하나로 생성부터 수정까지 가능한 과정을 목표로 했습니다. 그리고 생성된 자산이 새 아이덴티티의 기준에 맞는지 판단하고 구분하는 가이드와, 부적합한 결과가 나왔을 때 대응할 프롬프트까지 문서에 넣었습니다.

KT 내부용 AI 아이콘 생성 도구 화면

여러 도구를 조합하던 방식에서 단일 도구로 옮긴 건, 결과물의 최고점보다 에이전시 없이도 매번 같은 수준이 나오는 지속성을 고른 선택이라고 봅니다. 결과물이 아니라 판단 기준과 교정 방법을 넘긴 겁니다. 함께 실린 도구 화면을 보면 색은 FE2E36을 비롯한 다섯 개의 값 중에서만 고르게 돼 있고, 해상도와 화면비도 정해진 선택지로 주어집니다. "TAXI가 적혀있는 자율주행 차량", "KT WIZ가 적혀있는 야구 유니폼" 같은 짧은 문장만 넣으면 반투명한 질감의 아이콘이 나옵니다. 브랜드의 울타리가 문서의 문장이 아니라 도구의 파라미터로 들어가 있는 거죠. 노현준 디자이너가 리브랜딩을 하는 이유 중 하나로 맥락 없는 디자인 시스템이 내부 구성원에게조차 이해되지 못해 오남용되는 일을 꼽았는데, 이 가이드는 그 오남용을 막는 가장 구체적인 장치로 보입니다.

흥미로운 건 같은 프로젝트 안에서 두 자산이 정반대 방식으로 넘겨졌다는 점입니다. 대량으로 만들어질 아이콘은 파라미터와 판정 기준으로 단단히 묶였고,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앰비언트 텍스처는 예시로 넘겨졌습니다. 저는 장기적으로 일관성이 흔들릴 곳이 후자라고 봅니다. 아이콘은 도구가 지켜 주지만, 질감은 결국 사람의 눈과 손에 맡겨지니까요.

덧붙여 무심코 드러난 장면 하나. 기존 빨강과 검정에 보라, 초록, 파랑이 새로 더해졌다는 질문에 유희정 디자이너는 KT 디자인팀이 먼저 정리한 메인·서브 컬러를 바탕으로 온오프라인에서 일관되게 운영될 시스템을 고도화했다고 답합니다. 왜 그 세 색인지는 답에 없습니다. 색의 결정은 고객사 쪽에서 내려졌고 플러스엑스의 몫은 그걸 시스템으로 다듬는 일이었다는, 이 프로젝트의 역할 경계가 그 한 문장에 비칩니다.

김아영 디자이너는 리브랜딩에서 새로움을 만드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면 안 되고, 헤리티지는 지난 자산이 아니라 지금의 기업을 인식시키는 기반이라고 말합니다. 유희정 디자이너는 새 자산이 기존 자산과 잘 어울리는지 계속 점검해야 한다고 덧붙이고요. 로고를 바꿀 수 없는 브랜드를 맡았다면, 저는 이 인터뷰에서 세 가지 순서를 가져가겠습니다. 유지할 것과 새로 해석할 것을 먼저 가르고, 새 언어는 바꿀 수 없는 로고 안의 형태에서 끌어내고, 넘길 때는 완성된 결과물보다 판단 기준을 넘기는 것. 플러스엑스는 앞의 둘을 훌륭하게 해냈고, 마지막 하나는 아이콘에서는 해냈고 질감에서는 아직 시험을 앞두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