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 지켜야 할 건 서체 선택이 아니라 타이포그래피 규칙이다

디자인 시스템, 우리는 왜 서체 고민을 멈췄을까 2편 타이틀

제약이 있다는 것과 그 제약 안에서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라이트브레인 블로그에 실린 원종훈 디자이너의 글은 이 문장에서 출발합니다. 모바일 퍼스트와 기술적 제약 속에서 '안전한 표준'으로 타협하다 보니, 디자이너들이 프로젝트에 맞는 서체를 검토하는 과정 자체를 건너뛰게 됐다는 진단이에요. 모두가 AI로 디자인 시스템을 만들고 프롬프트 몇 줄로 화면을 뽑는 데 몰두하는 지금, 관성적인 폰트와 규격화된 시스템만 주입하면 AI가 만들 수천 개의 화면도 차별화 없는 매끄러운 껍데기가 될 거라고 경고합니다.

'제약과 고민의 생략은 다르다'는 구분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그리고 AI가 평균값을 가장 잘 만든다는 지적도 맞아요. 갈라지는 건 그다음입니다. 글은 그 해법의 중심에 '서체의 선택'을 놓는데, 저는 중심이 서체가 아니라 규칙에 있다고 봅니다.

프리텐다드로 모인 건 게으름만이 아니다

많은 팀이 프리텐다드나 시스템 폰트로 수렴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한글 웹폰트는 용량이 크고, 로딩이 늦으면 화면이 흔들리고, 다국어와 숫자·기호까지 고르게 받쳐주는 서체는 생각보다 적고, 접근성 검수와 유지보수까지 생각하면 검증된 서체 하나가 주는 안정감이 큽니다. 이걸 전부 '고민을 멈춘 결과'로 부르면, 실제로는 고민 끝에 내린 결정까지 매너리즘으로 묶이게 돼요.

재밌게도 글이 내놓은 처방 중 하나가 이 점을 스스로 보여줍니다. 같은 프리텐다드, 같은 시스템 폰트를 쓰더라도 브랜드 톤에 맞춰 타이포 스케일(Scale)과 비율, 행간, 자간을 브랜드 전용 규칙으로 정교하게 다듬으라는 대목이에요. 저는 이게 글 전체에서 가장 강한 처방이라고 봅니다. 서체를 바꾸지 않고도 목소리를 바꿀 수 있다면, 차별화의 무게는 서체 선택이 아니라 타이포그래피 시스템에 있다는 뜻이니까요.

디스플레이 서체를 얹기 전에 셈할 것

글은 본문은 표준 시스템 서체에 맡기더라도, 대형 타이틀이나 브랜드 키 비주얼만큼은 서브셋(Subset)으로 경량화한 개성 있는 디스플레이 서체를 조합해보라고 권합니다. 가변 폰트(Variable Font)나 웹 전용 폰트 같은 새로운 시도를 개발팀과 함께 고민하는 것도 디자이너의 영역이라고 하고요. 방향은 좋지만 비용도 함께 셈해야 합니다. 서브셋은 미리 정한 글자만 담기 때문에, 사용자 이름이나 검색어처럼 동적으로 들어오는 텍스트가 타이틀에 섞이면 글자가 빠지거나 다른 서체로 대체됩니다. 라이선스 범위도 확인해야 하고요. 마케팅 페이지처럼 문구가 고정된 화면에는 잘 맞고, 콘텐츠가 계속 바뀌는 제품 화면에는 위험한 선택입니다.

AI가 복제하는 건 서체가 아니라 기본값

AI 이야기로 돌아오면 제 반론이 더 분명해집니다. AI 화면 생성 도구가 차별화 없는 결과를 내는 건 서체가 평범해서가 아니라 규칙이 비어 있어서예요. 스케일 단계, 제목과 본문의 행간 비율, 크기별 자간 보정, 굵기를 쓰는 조건 같은 결정이 문서나 토큰으로 적혀 있지 않으면, AI는 학습한 평균값으로 그 빈칸을 채웁니다. 반대로 그 결정들이 디자인 토큰과 명세로 남아 있으면, 같은 프리텐다드로도 AI는 그 브랜드다운 화면을 만들 수 있어요.

그래서 디자인 시스템 팀에 권하고 싶은 순서는 이렇습니다. 서체 교체 회의를 열기 전에, 지금 쓰는 서체로 내린 타이포그래피 결정을 AI가 읽을 수 있는 규칙으로 먼저 써두는 것. 디지털 인터페이스의 80% 이상이 텍스트라는 글의 말이 맞다면, 그 80%의 품질은 서체 이름보다 그 서체를 다루는 규칙에서 더 크게 갈립니다.

물론 원종훈 디자이너의 주장이 그대로 맞는 경우도 있습니다. 문장 자체가 상품인 에디토리얼 서비스나, 서체가 곧 브랜드 자산인 회사라면 서체 선택은 여전히 가장 큰 결정이에요. 그런 팀이 '어차피 모바일이니까'라며 기본값으로 넘어갔다면 이 글의 질문을 정면으로 받아야 합니다. 다만 대부분의 프로덕트 팀에게 AI 시대의 숙제는 새 서체를 찾는 일보다, 이미 쓰고 있는 서체에 대한 결정을 빠짐없이 적어두는 일에 더 가깝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