획 하나에 수백 번의 고민 — AI가 못 흉내 내는 서체 디자이너의 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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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어 한 줄이면 AI가 뭐든 만들어주는 시대잖아요. 근데 이런 생각 안 해보셨어요? 모든 사람이 AI의 폭발적인 생산성에 매료돼 있는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압도적인 속도나 완벽한 결과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요. 원하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맥락과 태도 — 그쪽이 더 중요해지고 있어요.
NHN BX팀의 2026년 첫 번째 업무교류회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했어요. '기술이 대체할 수 없는 브랜드 기획자의 고민과 디자이너의 온도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다소 막막한 질문이죠. 이 글은 아홉 명의 '휴먼'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의 기록이에요.
2026년 3월의 어느 금요일. 다른 사람들이 프롬프트를 입력하느라 손가락을 바삐 움직일 때, BX팀은 튼튼한 두 다리를 엔진 삼아 용산의 어느 언덕배기를 오르는 중이었어요.
'어서오십시오' — 양장점 유니버스에 발을 들이다
막다른 골목에서 걸음을 멈춰요. '어서오십시오'라는 짧고 강렬한 여섯 글자. 소박한 뒷골목에 어울리지 않게 반짝거리는 전광판이 있나 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양장점의 마스코트 현판이었어요. 정중한 문구와 달리 다소 격동적인(!) 폰트 디자인을 보니 — 서체 스튜디오 '양장점'을 알리기에 이보다 완벽한 표식은 없을 것 같더라고요.

양장점은 한국의 서체 디자인 스튜디오예요. 한글 서체를 개발하는 장수영 디자이너와 라틴 서체를 담당하는 양희재 디자이너가 함께 운영하고 있어요. 한글 바탕체를 새롭게 해석한 '펜바탕' 서체를 개발한 곳으로 유명한데, 그 외에도 무신사, 토스, 롯데캐슬 등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브랜드의 전용 서체에 양장점의 흔적이 남아 있어요. NHN과는 2024년 리브랜딩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NHN Sans 한글 서체 개발을 협업하면서 인연을 맺었거든요.

첫인사는 문밖에서부터 시작돼요. 한쪽 면을 전부 유리창으로 마감해서 건물 밖에서도 작업공간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거든요. 기다란 철제 테이블과 컬러풀한 의자, 철제 선반 위 오브제들이 창밖으로 드러나요. 보통 스튜디오라면 블라인드를 쳤을 자리. 양장점은 창작의 과정을 여과 없이 드러냄으로써, 서체 스튜디오가 일하는 방식 자체를 브랜딩의 영역으로 끌어올렸어요.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의자와 '깔맞춤'을 한 듯한 네온 컬러의 서적들, 레이블이 잘 보이는 방향으로 세팅된 와인병 여러 개, 그리고 선반 위의 이 모든 오브제들이 철제 테이블 표면에 투영되는 모습. 벽이 아닌 바닥에 내려놓은 액자까지. 언뜻 무심해 보이는 배치지만, 사실은 하나하나 세밀하게 계산된 의도라는 걸 알아차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대요. 장수영 디자이너가 들려준 서체 디자인 철학에 명백한 힌트가 있었거든요.
"서체 디자인에 당연한 건 없어요. 당연해 보이는 획 하나에 사실은 수백 번의 고민이 담겨있고, 그 고민들이 모여서 일정한 시스템을 이루고 결국 하나의 서체가 만들어지는 거니까요. 이건 서체 디자인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도 적용되는 부분일 거예요."
이곳이 당연한 사무실이 아니라, 치밀하게 계획된 양장점 유니버스의 일부라는 걸 느낀 순간. 공기가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고.

어워드 수상 다음에 해야 할 냉정한 질문
이번 업무교류회를 계획하면서 BX팀이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앞으로 NHN의 브랜드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운영할 것인가'였어요. 최근 NHN 리브랜딩 프로젝트가 Red dot, iF, IDEA 등 글로벌 디자인 어워드에서 잇따라 수상하면서 대외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거든요. 근데 팀이 생각한 건 좀 달랐어요. 지금이야말로 냉정한 리뷰와 점검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봤대요.
장수영 디자이너의 코멘트가 핵심을 찔렀어요. "어워드 수상은 기쁜 일이지만, 서체가 의도한 디자인에 맞게 현장에서 사용되고 있는지도 잘 봐야 해요. 화려한 그래픽은 첫 눈에 멋져 보여도 잘 쓰이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거든요." 맞는 말이에요. 만드는 것과 잘 쓰이게 하는 건 별개의 싸움이잖아요.
이어서 덧붙인 말도 무게가 있었어요. "결국 브랜드만의 일관된 경험을 지속적으로 심어주는 디자인이 오래 기억됩니다. 특히 NHN처럼 다양한 서비스를 아우르는 브랜드일수록, NHN Sans가 일관된 톤으로 잘 적용되고 있는지 지속적으로 살펴야 해요."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하고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이 해주는 코멘트라 BX팀원들에게 많은 생각을 자아내게 했대요.

브랜드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건 조형적인 완벽함 그 자체가 아니거든요. 최선의 결론을 내리기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수많은 레이어, 결과물이 나온 뒤에도 본래의 의도대로 디자인이 기능할 수 있도록 멀리 내다보고 설계하는 책임감. 최적의 가독성을 구현하기 위해 미세하게 웨이트를 조절하고, 알파벳과의 조화를 위해 수많은 변수를 고려해서 내리는 결정. 이 모든 과정이야말로 AI가 단 몇 초 만에 뽑아내는 결과물에는 결코 담을 수 없는 것 아닐까요. (솔직히 이 부분에서 좀 뜨끔했어요.)
그리고 이렇게 완성된 브랜드 자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게 BX팀의 역할이에요. 대화가 오가는 중에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했다고 해요. 매일 모니터 앞에 앉아 결과물을 쏟아내던 그 시간 동안, 이런 고민을 얼마나 의식하고 어디까지 섬세하게 다루고 있었는지.
디자이너가 아닌데 디자인팀에 있다는 것
BX팀에는 디자이너만 있는 게 아니에요. 유일한 기획자가 있거든요. 디자이너가 아닌데 디자인팀 소속이라니 — 장수영 디자이너도 신선한 자극을 받은 모양이에요. "BX팀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는 호기심 어린 질문에, 기획자 본인도 자신의 역할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됐다고.
BX팀의 기획자는 브랜드의 컨셉을 정교하게 설정하고, 디자이너의 작업물이 그 방향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길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요. 프로젝트 시작 단계에서부터 단단한 기획이 뒷받침돼야 디자이너는 그 맥락 안에서 길을 잃지 않고 마음껏 고민할 수 있잖아요. 나아가 그 의도를 단단하게 지켜내는 것까지 기획자의 몫이에요.
브랜딩에 대한 이야기는 점점 더 넓고 깊은 데로 흘러갔어요.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대표로서 마주하는 현실적인 무게에서 시작해, 각자의 자리에서 앞으로 커리어를 어떻게 확장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논의로. 심지어 은퇴 이후의 삶까지. '브랜드'와 '디자인'이라는 화두가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확장시킬 수 있다는 게 놀랍더라고요.

돌고 돌아서 결국은, 우리 브랜드만의 고유한 생명력을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단번에 마침표를 찍을 순 없겠지만, 적어도 어떤 태도로 일해야 하는지는 분명해졌어요. '얼마나 효율적인지'가 아니라 '얼마나 진심을 다해서 고민하는가'. 알고리즘이 흉내낼 수 없는 영역이니까요.
아홉 명이 기억하는 양장점의 온도
BX팀원들이 남긴 후기가 인상적이었어요.
"오랫동안 회사원으로 지내다가 오랜만에 디자이너다운 공간에 들어서니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던 시절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어요. 스스로의 회사를 만들어낸 용기, 계속해서 도전적인 태도로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는 수영 님의 모습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수영 님이 작업을 대하는 태도가 인상적이었어요. 웃으면서 이야기하시다가도 작업물을 소개해주실 때는 순간적으로 표정이 진지하게 변하시더라고요." 이 디테일이 좀 좋지 않아요? 웃다가 진지해지는 순간 — 그게 진심이 묻어나는 순간이잖아요. "그동안 작업했던 프로젝트들의 히스토리를 들려주셨는데요. 새로운 과제 앞에서 망설이지 않고 늘 도전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라는 팀원도 있었고요.
"스튜디오에 들어갈 때부터 환영받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어요. 어서오십시오라는 표식도 그렇고, 게스트를 위한 슬리퍼장까지 있어서 공간 자체가 센스있다고 생각했어요." "유명 디자이너 체어와 테이블 등 인테리어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첫인상이 성수동 카페에 온 것 같았는데, 그 힙함이 결국은 디자이너의 고민과 취향에서 비롯된 거라는 걸 알고 나니 기분이 묘하더라구요." "지금은 회사에 소속되어 있지만, 커리어 개발이 필요한 개인이자 디자이너로서 앞으로 다양한 방향으로 진로를 개척해나갈 수 있다는 점을 배웠어요."라는 후기도 있었어요.
또 다른 팀원은 이렇게 말했어요. "공간이든 브랜드든, 결국은 그걸 대하는 사람의 태도와 그 결을 닮아가는 것 같아요. BX팀의 작업만큼은 인간다움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익숙한 언덕을 내려가는 길. 숙제 하나를 얻은 듯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답 하나를 찾은 듯 마음만큼은 한결 가벼웠다고. 서체 획 하나에 수백 번의 고민을 담는 사람들 — 효율의 시대에 그게 오히려 경쟁력이 되는 아이러니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