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hropic 디자인 리드가 더블 다이아몬드에 사망선고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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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sign process is dead." Anthropic 디자인 리드이자 전 Figma 디자인 디렉터였던 Jenny Wen이 한 말이에요. 디자인 프로세스가 끝났다니. Figma에서 디자인 시스템을 깔던 사람이 이제 와서 프로세스를 부정하다니요. 청천벽력 같은 소리.
당연히 반응은 갈렸어요. 질타와 동의가 뒤섞인 댓글창. 근데 불편한 건, 이 말이 틀렸다고 반박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거예요. 한국디자인진흥원이 정리한 서비스경험디자인 프로세스 — (준비하기)-발견하기-정의하기-개발하기-전달하기 — 서비스경험디자인기사 자격증 준비할 때 교과서처럼 봤던 그 흐름이 AI 시대에 들어서면서 통째로 흔들리고 있거든요.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마다 길라잡이처럼 참고했던 이론서인데, AI의 등장으로 이 선형적 프로세스가 순환적이고 동시다발적인 흐름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거예요.
PM이 디자이너보다 빠르게 프로토타입을 찍는 세상
솔직한 얘기 하나 할게요. 지금 PM들은 번거로운 리서치도, 페르소나 설정도 건너뛰고 바로 작동하는 프로토타입을 만들어요. 디자이너보다 빨리. 예전에는 프로토타이핑이 디자이너의 전유물이었잖아요. 그게 '바이브 코딩'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직군에 퍼져버렸어요. 디자이너의 책임이었던 프로토타이핑이 이제는 공통 역량이 된 셈이죠.
반대로 디자이너도 직접 코딩해서 최종 구현까지 스스로 완결하는 실행력을 갖게 됐고요. PM은 디자이너 영역으로, 디자이너는 개발자 영역으로. 경계가 양방향으로 무너진 거예요.
업계 전반에 해고와 인력 감축이 이어지는 가운데, 재밌는 패턴이 보이더라고요. 소통 비용이 낮은 소규모 팀이 대규모 조직보다 더 강한 성과를 내요. 더 적은 인원으로 더 큰 결과. 이게 그냥 유행어가 아니라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에요.
그러면 디자이너에게 남는 건 뭘까요? 취향(Taste), 제작력(Craft), 품질(Quality). 더 이상 엄격한 프로세스를 따를 여유가 없고 AI로 뭐든 만들어낼 수 있는 세상에서, 뭘 선택하고 어떻게 큐레이션 하느냐가 디자이너의 가치를 결정짓는다는 거죠.
프로세스를 맹신하면 안 되는 이유가 꽤 구체적이다
모든 프로젝트는 조건이 달라요. 이해관계자, 복잡성, 문제 영역, 불확실성, 기술적 제약, 타임라인, 비즈니스 니즈, 투입 인력. 이 변수들이 전부 다른데 매번 동일한 프로세스를 적용한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요.
더 아픈 얘기가 있어요. 프로세스를 완벽히 따랐다고 해서 결과의 질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 AI 시대에는 기존 프로세스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선언이에요. 지금까지 프로세스에 의존해왔거나, 조직에서 강제된 방식이었다면,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어요. 새로운 기대를 이끌어가려면 이 불편함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는 거예요. (읽으면서 "그래도 프로세스 없이 어떻게..." 하는 분들 계실 텐데요, 그 불편함이 정확히 Jenny Wen이 찌르고 싶었던 지점이에요.)
더블 다이아몬드를 버린 자리에 뭘 놓을 건가
Jenny Wen이 프로세스를 죽이고 대신 제시하는 건 다섯 가지예요.
첫째, 해결책 우선 접근. 문제를 정의하기 전에 먼저 솔루션을 프로토타입으로 만들어보는 거예요. 전통적인 UX에서는 말도 안 되는 순서잖아요. 근데 AI가 프로토타입 비용을 거의 0에 가깝게 만들어버린 지금, 굳이 문제를 완벽히 정의한 다음에야 만들어볼 이유가 있나요?
둘째, 디테일에 대한 집요함. 끝없이 퀄리티를 다듬고 반복 작업하는 과정이에요. 더블 다이아몬드는 이런 반복적 과정을 위한 여지를 주지 않아요. 발산-수렴-발산-수렴으로 깔끔하게 끝나는 모델이니까요.
셋째, 직관으로 판단하기. "그거 그냥 감 아니야?" 할 수 있는데, 아니에요. 직관은 수많은 사용자 피드백, 리서치, 데이터 경험이 축적돼서 만들어진 근거 있는 빠른 판단력이에요. 모든 결정을 A/B 테스트할 수는 없거든요. 그래서 디자이너의 전문적인 직관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는 거예요.
넷째, 단계를 건너뛰거나 새로 만드는 유연함. 매번 가장 적합한 단계가 뭔지 파악해야 하고, 상황에 맞게 단계를 생략하거나 새로 만들어야 해요. 디자이너의 가치는 프로세스를 따르는 게 아니라 프로세스를 설계하는 능력이에요.
다섯째가 좀 의외인데요. "사람을 웃게 만드는 것." FigJam의 스탬프, 이모트, 커서 채팅 같은 기능들 있잖아요. 이것들이 문제 정의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 "그냥 사람들을 미소 짓게 만들자"는 단순한 의도에서 시작됐대요. 프로세스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결과물. (이 부분에서 교과서 펴놓고 공부했던 분들 심장이 좀 아플 수 있어요.)
4주를 고민했는데 — 그래서 프로세스를 믿었던 사람의 이야기
잠깐 딴 얘기인데, 이 강연을 정리한 글쓴이의 경험이 꽤 와닿더라고요. 2024년에 서비스경험디자인기사 자격증을 땄고, 디자인 전공 4학년 때 프로젝트를 시작했어요. 개강과 동시에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보통 2주 정도 주제를 정하는 시간이 주어지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 시간을 '죽음의 시간 앞둔 휴식 기간' 정도로 생각한대요.
글쓴이도 처음엔 그랬어요. 그러다 4학년에 들어서 주제를 선정하는데 리서치하고, 고민하고, 뒤엎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발견' 단계에서만 무려 4주가 걸렸다고 해요. 보통 2주면 끝나는 과정에 두 배. 처음으로 주제 선정이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걸 느낀 순간이었다고요.
결국 초기 단계에서 고뇌했던 시간만큼 좋은 결과로 이어졌고, "충분한 리서치가 좋은 결과를 만든다"는 사실을 믿게 됐대요. 그 사실을 깨달은 것만으로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묘하게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고요. 더블 다이아몬드의 앞단이 프로젝트 성패를 좌우한다고 확신했던 거예요.
근데 여기서 묘한 반전. 극변하는 환경에서는 빠르게 실행하고 실험할 수 있는 실행력이 곧 기업의 경쟁력이라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게 됐다는 거예요. 4주 동안 발견 단계를 고뇌한 경험과, 프로세스를 건너뛰어야 살아남는 현실이 동시에 맞는 셈이에요.
Jenny Wen이 묻더라고요. 직관으로 내린 결정을 증명하려고 쓸데없는 시간을 보낸 적 없냐고. 혹은, 인지하지 못한 편향 속에서 검증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니냐고. 솔직히 이 질문 앞에서 자신 있게 "아니요"라고 할 수 있는 디자이너가 몇이나 될까요.
AI가 UI를 실시간으로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이화여대 강수진 교수는 더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요. 전통적인 더블 다이아몬드 기반 UX 프로세스가 AI 환경에서는 유효하지 않다는 진단인데, 이유가 명확하거든요. 생성형 AI와 사용자가 상호작용하는 환경에서는 문제 발견과 정의, 개발과 검증이 선형적으로 진행되지 않아요. AI의 출력과 사용자 반응을 기반으로 지속적으로 순환하고 보정되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강 교수가 제시하는 새로운 흐름은 이래요. 'AI 기반 기회 탐색과 데이터 검증 - 프롬프트 설계와 개념 프로토타이핑 - 성능 평가와 확장.' 기존의 발견-정의-개발-전달과는 완전히 다른 뼈대죠.
인터페이스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지적도 있어요. 기존의 챗 기반, 텍스트 중심 선형 인터페이스를 넘어서 생성형 UI, 공간적 레이어, 실시간 흐름을 기반으로 한 AI-native 인터페이스가 등장하고 있다는 거예요.
실제 사례가 좀 더 와닿더라고요. 예약 앱에서 AI가 실시간으로 사용 패턴을 분석하면서 "오후에 예약 취소가 많네?" 하고 해당 시간대 버튼을 강조 수정해요. 이커머스에서는 리뷰를 먼저 보는 사용자와 가격을 먼저 보는 사용자에게 UI 우선순위가 자동으로 달라지고요. OTT는 더 노골적이에요. "특정 장르를 2초 안에 스킵"하면 해당 장르 카드 노출이 줄어들고, 오프닝 시퀀스를 매번 스킵하면 다음부터 해당 시리즈 시작 시 오프닝 자동 스킵. 모빌리티 앱은 집-회사 경로를 매일 반복하면 출발 시점에 맞춰 호출 버튼을 알아서 띄워요.
결국 AI-native UX의 끝은 초개인화예요. 데이터 분석, 자동화, 실시간 예측이 맞물리면서 사용자마다 다른 인터페이스를 받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디자이너는 뭘 하느냐? 뭔가를 직접 만들기보다 무엇을 만들지 선택하고, 변화하는 시스템의 방향을 설계하는 일에 가까워지고 있어요. 어떤 데이터를 기준으로 변화할 건지, 어디까지 자동화할 건지, 그 변화가 사용자에게 어떤 경험으로 전달될 건지 — 이런 판단이 디자이너의 핵심 능력이 되고 있는 거예요.
만드는 사람에서 판단하는 사람으로. 여전히 과도기고 정답이라 할 건 없어요. 근데 디자인 프로세스가 죽었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어요. 프로세스는 안 죽었고, 프로세스를 맹신하는 태도가 죽은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