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길 것만 남겼다'는 말에 반만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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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러너의 논지는 이렇습니다. 삼성물산이 8월 31일 발표한 래미안의 새 BI 는 5년 만의 변화인데, 2021년의 리뉴얼이 복잡함을 덜어내는 현대화였다면 2026년은 무엇이 정말 래미안다운지를 다시 골라내는 두 번째 덜어내기였고, 그 끝에 살아남은 게 3선 심볼이다. 20년 넘게 같은 형태를 써 온 덕에 심볼 하나로 정체성이 전달되는 단계에 이르렀고, 그래서 청록과 회색을 버리고 블랙과 화이트로 가는 절제가 프리미엄으로 읽힌다. 긴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인지도가 있는 브랜드여야 이 선택이 가능하다는 조건까지 붙어 있어서, 논지로서는 빈틈이 적어요.
제가 갈라서는 지점은 하나입니다. "남길 것만 남겼다"는 말은 버린 것이 덜 중요했다는 뜻을 품고 있는데, 저는 래미안이 이번에 버린 것이 가장 멀리서 알아보이는 자산이었다고 봐요.
청록색은 장식이 아니라 자산이었다
변천사를 보면 래미안 그린과 래미안 그레이라 불리던 청록과 회색은 2021년 리뉴얼에서 3선 심볼과 함께 살아남았던 요소예요. 입체감과 한자 표기를 지우던 그 리뉴얼에서도 색만은 건드리지 않았다는 건, 적어도 그때까지 래미안을 알아보게 한 게 색이었다는 뜻이죠.

브랜드 자산 중에 색은 가장 먼 거리에서 작동합니다. 아파트 브랜드의 접점은 명함이나 앱 아이콘이 아니라 도로 건너에서 보이는 외벽이고, 그 거리에서 사람이 먼저 읽는 건 가는 세 줄의 형태가 아니라 색이잖아요. 반대로 블랙과 화이트는 누구의 것도 아닌 조합이에요. 절제가 프리미엄으로 읽힌다는 말은 맞지만, 그 문법은 고급을 표방하는 브랜드가 다 같이 쓰는 문법이라 소유할 수 없습니다. 이번 결정은 가장 소유 가능했던 요소를 내려놓고 가장 공유된 요소를 집어 든 셈이라, "남길 것만 남겼다"보다는 알아보게 하는 일을 색에서 이름으로 옮겼다는 게 정확한 설명이라고 봐요.
그 옮김이 틀렸다는 게 아니에요. 래미안이라는 이름 자체가 심볼과 색을 합친 것보다 큰 자산이라면 이 선택은 맞습니다. 다만 그건 심볼이 살아남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름이 그만큼 커졌기 때문이고, 글이 공을 3선 심볼에 돌린 건 그래서 조금 어긋나 보여요.
한글과 한자를 되살린 결정이 진짜 뺄셈이다
이번 리뉴얼에서 제가 가장 높게 치는 건 3종 워드마크예요. 2021년에 한자 표기를 지우고 RAEMIAN 영문만 남겼던 걸 되돌려 한글과 來美安 을 다시 넣었습니다.

색을 버린 결정과 정반대의 논리예요. 영문 하나로 통일하는 게 더 단순해 보이지만, 來美安 이라는 한자 이름은 이 브랜드만 가진 것이라 남기는 쪽이 자산을 지키는 뺄셈이거든요. 심볼의 높이를 낮추고 간격을 벌려 'From Height to Depth' 라는 지향점을 조형에 옮긴 것도 같은 결의 결정이고요. 이 두 결정은 래미안다운 것을 다시 골라냈다는 글의 설명에 정확히 들어맞고, 색을 버린 결정만 거기서 빠져나옵니다.
레이디러너의 논지가 맞는 조건은 분명해요. 이름이 색보다 큰 브랜드, 그리고 새 단지 외벽에 이 BI 가 올라갔을 때 도로 건너에서도 래미안으로 읽히는 경우. 래미안 트리니원부터 순차 적용된다니 그 검증은 건물이 해 줄 겁니다. 앞으로 몇 년은 청록색 구단지와 흑백 신단지가 나란히 서 있을 텐데, 그 둘이 같은 브랜드로 읽히는지가 이 리브랜딩의 진짜 시험이고, 그 시험을 통과하는 힘은 심볼이 아니라 이름에서 나올 거라고 저는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