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로 만든 키비주얼, 내년에도 다시 만들 수 있을까
![]()
채널톡 브랜드 디자이너 엠버가 공개한 이미지 가운데 제가 가장 오래 들여다본 건 완성된 키비주얼이 아니었습니다. 브릿지 모양의 그라디언트와 점토 조각이 조금씩 다른 각도와 색으로 수십 장 깔린 격자, 그러니까 탈락한 시안들이었어요.

도쿄 TODA HALL에서 열린 CHANNELCON26의 키비주얼과 45초짜리 오프닝 필름은 처음부터 끝까지 AI가 개입해 만들어졌습니다. 작업기는 이 경험을 달리는 스포츠카의 핸들을 쥐는 일에 빗대고, "손이 쓰던 시간이 줄어든 자리를, 판단하고 차별화하는 시간으로 채운 셈입니다"라고 정리하죠. 격자를 보면 그 문장의 무게가 실감 납니다. 만드는 시간은 줄었을지 몰라도 고르는 시간은 이만큼이었다는 뜻이니까요. 작업 기간이나 인원, 비용 숫자는 나오지 않아서 전체 시간이 줄었는지는 알 수 없고, 분명한 건 시간의 종류가 바뀌었다는 것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 사례를 자기 브랜드 작업에 들여오려는 팀이라면 한 가지를 먼저 따져 봐야 해요. 이 작업이 끝난 뒤 우리 손에 남는 게 무엇인가. 저는 이미지가 아니라 문서라고 봅니다.
결과를 가른 건 모델보다 어휘
"4천 년 CS의 종말, AI로 시작되는 완전히 새로운 시대." 컨셉은 한 줄이지만 그림으로 옮기려면 결정할 게 끝이 없습니다. 점토판은 어떤 색과 텍스처인지, 새겨진 글자는 어떤 형태인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부서지는지, 'AI다운 빛'은 어떤 색의 어떤 광원이고 어느 방향으로 뿜어져 나오는지. 엠버는 레퍼런스를 모아 뜯어보면서 원하는 시각 효과를 AI와 함께 언어로 바꿨고, 그 과정에서 Dichroic, Iridescent, Chromatic Bloom 같은 머티리얼 용어를 건져 올렸어요.

캡처 속 표는 방향이 뚜렷해서 눈에 들어옵니다. milky, cloudy, foggy, misty를 지우고 luminous, glowing, radiant, lit from within으로. 뿌옇다는 말을 빛난다는 말로 바꾸자 이미지가 바뀐 거죠. 작업기가 말하는 프롬프트의 핵심, "내가 원하는 시각 효과를 최대한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실제로 어떤 모양인지를 이 표가 보여 줍니다.
제 판단으로는 이 전환표가 이번 작업에서 가장 값진 산출물 중 하나예요. 디자이너가 원래 갖고 있던 머티리얼 감각을 모델이 알아듣는 단어로 옮긴 사전이고, 다음 작업에서 그대로 다시 쓸 수 있으니까요. 같은 모델을 써도 이 사전이 없는 팀이 받는 건 평균적인 그라디언트입니다. 머릿속에 구체적인 묘사가 있어야 AI도 평균의 범주를 벗어난다는 엠버의 결론을, 저는 자산의 관점에서 다시 읽고 싶어요.
45초를 붙잡아 둔 제작 문서
오프닝 필름에서 가장 큰 결정은 작년 채널콘의 모션그래픽 스타일을 버리고 시네마틱 필름으로 간 것이었습니다. 4천 년, 전 지구적 스케일의 이야기에 모션그래픽으로는 무게가 실리지 않는다는 판단이었고, 2~3초짜리 영상만 만들어 봤던 사람이 10초가 넘는 이야기를 AI로 만들어야 했죠. 작업 순서는 이랬습니다. 스토리보드를 손으로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제작 계획서를 쓰고, GPT Image 2와 NanoBanana로 시대별 스틸 키프레임을 만든 뒤, Higgsfield의 Seedance로 모션을 입혔어요.

계획 문서에는 시대별 시각 언어, 컷마다의 카메라 프리셋, hex 값까지 적힌 컬러 팔레트, 컷별 ACTION·CAMERA·LIGHTING·MOOD가 들어 있습니다. 이미지를 먼저 다 만드는 단계에는 '가장 중요'라는 표시가 붙어 있고요. 영상을 생성하고, 아쉬운 부분을 AI에게 피드백하고, 그걸 반영해 문서를 고치고, 고친 문서에서 프롬프트를 다시 뽑는 식으로 돌렸기 때문에 씬이 많아도 헷갈리지 않았다고 엠버는 적었습니다.
생성 이미지는 한 번 뽑히면 똑같이 다시 뽑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키비주얼은 보통 한 장으로 끝나지 않아요. 배너, 무대 화면, 굿즈, 다음 해의 후속 비주얼로 파생되는데, 그 파생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건 이미지 파일이 아니라 이 문서와 어휘 사전입니다. 작업기는 문서를 작업 과정의 일부로 소개하지만, 브랜드 쪽에서 보면 이게 디자인 시스템의 토큰과 같은 자리에 놓여야 할 결과물이에요.
로고를 생성에 맡기는 비용
한 가지 걸리는 선택도 있습니다. 시대를 대표하는 영상마다 이스터에그처럼 채널톡 로고를 숨겨 뒀고, 그 때문에 영상 컨트롤이 조금 더 까다로워졌다는 게 엠버의 설명입니다. 한 번 상영하고 끝나는 행사 필름이라면 감수할 만한 재미입니다. 다만 로고는 브랜드에서 가장 흔들리면 안 되는 자산이라, 파생물이 계속 나와야 하는 작업에서는 생성으로 그리게 하기보다 생성이 끝난 화면에 합성하는 편이 안전하다고 봐요.
거꾸로 AI로 만든 것 자체는 좋은 브랜드 결정이었습니다. "AI IS HERE"를 말하는 행사의 첫 45초를 AI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그대로 메시지의 증거가 되니까요. 모션그래픽이 주던 통제력을 일부 내주고 스케일과 공기를 얻겠다는 선택은, 효율보다 태도에 가까운 결정으로 읽힙니다.
내년에도 이런 비주얼을 다시 만들 수 있을까요. 이미지만 남겼다면 어렵고, 문서와 어휘를 남겼다면 됩니다. 행사처럼 한 번에 몰아 쓰는 고밀도 비주얼이고 머릿속에 그림이 선명한 디자이너가 있다면 이 방식은 지금 바로 들여와도 좋습니다. 매일 파생물이 나와야 하는 브랜드 시스템이라면, 제작 문서를 파일 서버 한구석이 아니라 브랜드 가이드 옆에 버전을 붙여 두는 것까지가 도입의 범위예요.